[s] 믿을진 모르겠지만.

쿄토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다.
오후 내내 쨍쨍했던 하늘은 어디로 가고,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둑어둑 꼬질꼬질한 구름이 끼더니 결국은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은각사를 둘러보고 철학의 길을 따라 열심히 내려오던 그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가방에는 카메라와 전자사전, 생수통 그리고 교토 시내지도가 전부였건만. 비가.
일단 카메라는 융에 돌돌말아 싸고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점점 빗방울은 굵어지고, 길도 서서히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걸어서 청수사까지 가려던 계획은 수정되었고, 편의점이든 비를 피할 넓은 공간이든 나타나길. 내 마음속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골목골목, 어쨌든 큰길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큰 도로로 무작정 향했다.
편의점은 없었고, 저 멀리 보이는 많은 무리의 사람. '그래 저곳이면 어떻게든 비를 피할 수 있겠지.'


수학여행을 나온듯한 중고생들. 그틈에 더이상 비를 피할 자리가 없었던 나는 이정표를 한장 찍고 다시 길을 걸었다.
아아- 그 많던 편의점이 어디로 간것이냐.
비를 쫄딱 맞아 생쥐꼴이 된 외국인의 모습이 신기한건지, 이 빗속에 우산을 쓰지 않은 한 덩치 큰 여자가 우스운건지 아니 그들은 전혀 나에 대한 생각을 안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냥 내 지레짐작일 뿐. 알 수 없는 무리들의 표정을 뒤로 한채 또다시 걸었다.

이윽고,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 내 눈에 들어왔다.
교토시 미술관.
이미 관람은 종료되었고, 현관 앞은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금발을 한 외국 여자 둘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그 옆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버스에서 내린 후 3시간 넘게 걸었으니 쉬어 줄 때도 되었다.

자리를 넓게 잡고, 바닥에 철푸덕 소리를 내며 앉았다.
이곳 저곳 귀퉁이마다 젖어버린 지도를 펼쳐서 말리고, 카메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로 갈지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빗방울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일 간의 일정이 나에겐 조금 힘이 들었던 것일까? 작은 한숨과 함께 온몸이 저릿저릿 함을 느낀다.
교토의 한 길가에서 샀던-집에도 좀 가져가고 친구들을 나눠줄-과자봉지들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휴지를 슥 빼내어 무심하게 닦았다.
또다시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걸 보니, 어제 일기 예보에 오늘 비가 온다는 말이 있었나보다.
난 오늘 아침에 뉴스를 들었는데도 왜 몰랐을까?
검정 우산을 쓰고, 커다란 초코렛을 우적우적 먹으며 약간 긴머리의 남자가 지나간다. 나를 흘깃 보고.
그래, 나 우산 없어서 비 피하는 외국인이다. 힘들어 죽겠다. 라고 속으로 소리 쳐본다. 그때 그 남자가 우산을 접으며 미술관 쪽으로 다가온다. 서성거린다. 오늘 입장은 모두 끝났다는 팻말을 보고 멍하니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내쪽을 흘깃 바라본다.
내게 다가온다. 나에게 말을 건다.
"옆에 앉아도 될까?"
나는 순간 당황.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하는 순간 내 목에서는 아무런 고민없이 좋다는 대답이 나갔다.
그때부터 그와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난 일본어를 잘 못한다고, 여행중이라고 말하자 놀래며 그 남자는 내가 일본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Koi Onishi 흔한 성이 아니라고 했다. コイオニシ이렇게 써야 맞는건가?
내 이름의 한자가 궁금하다며 한자를 써달라고 했다. 또 그의 한자와 이름을 적어주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했고, 그는 영어를 잘하는 듯 했다. 어렸을때부터 유럽쪽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살다가 대학을 교토로 왔다고.
교토 대학에 다니고 있고 법학과 라고 했다.
나와 그의 대화는 대략 2시간 정도 이루어 졌고, 나의 대화는 전자 사전을 찾느라 뚝뚝 끊어지기만 했다.
내가 일본인 인줄 알고 말을 걸었던 것이 흥미있게도 한국인이었고, 혼자 여행 온 여자였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고 했다.
내 카메라에 흥미를 보였지만, 선뜻 찍어준다고 하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 한장 못찍은게 아쉽기만하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 대한 이야기를 3시간 넘게 했을까?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는 나에게 우산을 씌워준다고 했다.
길안내를 받으며 버스정류장까지 그의 우산을 쓰고, 버스를 탈 때까지 기다려준.

메일주소라도 알아왔다면, 하는 생각이 아쉽기만하다. 왜 그때는 그냥 그렇게 보냈을까?
내가 친구들 주려고 샀던 과자를 주면서, 선물이라고 하자 너무 고마워 하며 그 자리에서 우적우적 맛있게도 먹던 해맑았던 사람이었는데. 다시 만날 수도 없겠지만. 다시한번 즐겁고, 감사했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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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4
  1. Favicon of https://dogguli.net BlogIcon 도꾸리 2009.01.26 14: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행복한 인연이네요~
    다음의 인연을 위해 지금의 인연은 잠시 놓아두는 것도~

    머, 만날 인연이면 언젠가는~
    아자아자~

    • Favicon of https://cactus0.tistory.com BlogIcon 선인장s 2009.01.28 01:50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요 ^^
      다음의 인연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후훗.

  2. Favicon of https://linetour.tistory.com BlogIcon 칸의공간 2009.01.26 15: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미래에 다시 만날 연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 Favicon of https://cactus0.tistory.com BlogIcon 선인장s 2009.01.28 01:51 신고 address edit & del

      정말 인연이라면, 또 언젠가 어느장소에서든 다시 만나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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